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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감 감옥
    엄마의 생각/생각 2023. 1. 31.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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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달의 마지막 날, 가온이는 유치원 졸업과 함께 독감을 얻었다. 주말이 끼어 병원에 바로 가지 못하는 바람에 회복이 더뎠다. 묵은 독감에 항바이러스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주는 하온이의 어린이집 방학이었다. 모처럼 단둘이 달콤한 시간을 보내야지. 엄마를 마음껏 독점하렴. 아이와 실컷 살을 부비고 눈을 맞추었다. 처음으로 누나 없이 키즈카페도 갔다. 태어나 세 돌을 앞두기까지 늘 경쟁 상태여야 하는 이 작은 아이를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나의 일과는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이후 불어닥칠 폭풍은 까맣게 모른 채였다.

    가온이의 기침은 열흘 남짓 계속되었다. 독감은 의무 격리 기간은 없지만 그렇다고 전염력을 가진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갈 수도, 집에 혼자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완치될 때까지 꼼짝없이 집에 머무는 수밖에 없었다. 새해 액땜했다고 생각하자, 아이에게 터무니없는 위로를 건넸다.

    남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집에 들어왔다. 역시나 독감이었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는 다를 것 없이 출근했다. 확진 당일 조퇴를 한 게 전부였다.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한 달 사이 이미 집의 일로 몇 차례 양해를 구하고 휴가를 얻었던 터라 더 이상 자리를 비우기는 어려웠으리라.

    마스크를 쓰고 소독제를 손에 든 여자
    ⓒfreepik


    작은 집에 독감 환자가 둘이다. 아이들에게 마스크를 씌우고 필사적으로 집 안을 환기하고 소독했다. 작은 상을 펴 밥도 따로 먹고 잠자리도 바꾸었다. 그러나 누나가 마냥 좋은 하온이를 차마 말릴 수는 없었다. 소독제를 들고 동동거리며 아이들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콜록거리는 가온이를 나무랐다. “하온이 마저 독감에 걸리면 엄마는 나갈 거야. 독감 환자들끼리 서로 간호하고 있어.” 남편과 아이들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가시 돋친 마음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뾰족해졌다. 조금만 참자. 며칠만 무사히 넘기면 돼.

    마침내 가온이의 기침이 잦아들 무렵, 내일이면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짐작했던 일요일. 그날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하온이가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생일 케이크도 마다하고 방에 들어가 자겠다고 했다. 얼굴이 발갰다. 설마. 아이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뜨끈한 열감이 전해졌다. 가온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엄마 진짜 나가는 거냐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없었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듯했다. 나의 죄목은 뭘까. 가족 모두가 독감에 걸리도록 내버려 두고 혼자만 피해 간 죄? 연차를 편히 사용할 수 없는 남편을 둔 죄? 돌봄 노동을 대체할 경제력을 갖지 못한 죄? 아니면, 나를 갈아 넣을 각오도 의지도 없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죄?

    “아빠, 엄마 나가면 아빠 회사 가지 말고 우리랑 같이 있으면 안 돼?” 가온이가 울먹이며 남편에게 물었다.
    “회사는 일하는 시간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남편이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 이름으로 불리고 나의 자의로 움직이는 생활을 잠시나마 되찾고 싶었을 뿐이다. 2주를 감금당한 듯 지내다 겨우 단 한두 시간을 얻기 위해 남편에게 배려를 ‘부탁’하고 그의 ‘승인’을 구해야 한다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의 하루는 누구보다도 바쁘다. 가족을 돌봄과 동시에 시간을 쪼개고, 잠을 줄이고, 네 식구의 일정 사이사이를 짜 맞추어 나의 일을 한다. 아이들을 위해 직업을 갖는 것은 잠시 미뤄두었지만, 미래를 그리며 내실을 다진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화장은커녕 한겨울에도 젖은 머리를 공들여 말리는 일이 없을뿐더러, 1분 1초를 아끼고 싶어 언제나 편한 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달음박질을 한다. 그럼에도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넘쳐나서 고민스러울 지경이다. 그러나 당장 손에 쥐어지는 소득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에게서 나의 일은 존중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나의 일은 무가치한 여가로 여겨지기에, 나의 시간과 노동을 아무런 예고도 대가도 고마움도 없이 대수롭지 않게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고도 나는 남편이 밖에서 힘들게 벌어다 주는 돈으로 한가히 수영장에 다니며 먹고 노는 전업주부이고, 남편은 피땀과 같은 월급을 모조리 집에 갖다 바치고 집안일까지 함께 하는 헌신적인 가장인 것이다.

    속이 들끓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년 동안 설득하고 화내고 울부짖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기에, 개인의 의지로는 바꿀 수 없는 것이라 믿고 싶기 때문이다. 더 이상 논쟁할 기력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업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남편이 2주 만에 수영 강습에 갈 수 있도록 베풀어주었다. 역시 우울은 수용성이다. 50분 수영을 하고 나오니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아 맞다, 사는 건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지. 아름다운 세상 신나는 인생. 내뱉지 못한 마음은 꼭꼭 눌러두고, 다시 열심히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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